Episode 1
전왕전기(戰王傳記) 1권
<귀신의 무예>
1.서장
중원의 다른 성들에 비해 요녕성은 농업이 무척 발달한 곳이었다.
토양이 비옥하고 너른 평원이 널려 있어 일찍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농사가 발달했다.
하나 이곳은 흔히 중원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너무 먼 변방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문화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요녕성 사람들은 중원에 대해 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낙후된 환경 때문에 무림문파의 수가 매우 적었으나, 대신 그들의 기질은 매우 열정적이었고 또한 거칠었다.
그렇기에 중원의 그 어떤 문파도 변방이라고 요녕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일단 적이라고 간주되면 그 어떤 무인들보다 집요하면서도 지독하게 달라붙는 자들이 바로 요녕성의 무인들이었다.
때문에 중원의 무인들조차도 그들의 거친 기질에는 한발 양보를 할 정도였다.
요녕성 무순(撫順)은 요녕성의 중요 관도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현으로, 유서 깊은 유적과 매우 발달한 문물을 자랑했다.
무순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평원이 존재했다.
이곳은 예전 고려와 중원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피와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수백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아직까지 무순의 노인들이 그때의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들려줄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무순의 사람들은 이곳을 혈루평(血淚平)이라고 불렀다.
그날의 기억을 기리며 혈루평에 세운 것이 바로 청동흑룡상(靑銅黑龍像)이었다.
청동흑룡상은 길이 삼 장, 높이 이 장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물로, 무게만 만 근이 넘었다.
이 거대한 청동 구조물은 오늘도 혈루평을 굽어보며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청동흑룡상 인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혈루평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무순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흥분과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무순에는 북방을 대표하는 두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력보(大力堡)와 용선장(龍仙壯).
그들은 십 년 전부터 이곳 요녕성 인근을 지배해 온 대표적인 무림문파였다.
비록 인근에 모용세가(慕容世家)가 존재하였으나 오래전부터 봉문을 한 상태였기에, 실질적인 요녕성의 패자가 바로 두 문파였다.
그리고 오늘은 두 문파의 주인인 웅풍무도(雄風武刀) 만적상과 비검만천(飛劍滿天) 철호심이 비무를 결하기로 한 날이었다.
모용세가가 봉문한 이후로 두 문파는 요녕성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무력을 겨뤄 왔다.
그러나 두 문파 간의 힘은 호각지세(互角之勢), 양 문파의 힘이 엇비슷하기에 갈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에 두 문파의 주인들은 우두머리 간의 대결을 통해 요녕성의 주도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요녕성 전체로 퍼져 나갔고, 이에 많은 무인들이 그들의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무순으로 몰려들었다.
만적상과 철호심, 두 사람은 모두 능히 중원백대고수 안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들 간의 비무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도착했다.”
“저분은 용선장주 철호심 대협이다.”
“와아! 웅풍무도 만적상 대협이다.”
사람들의 탄성이 터졌다.
그들의 외침대로 두 문파의 주인이 각자 수하들을 앞세운 채 비무장으로 올라왔다.
“와아아-!”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요녕성을 대표하는 무인들이었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굴을 내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다.
만적상이 철호심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오, 철 장주.”
“얼굴이 좋아 보이오, 만 보주.”
철호심 역시 마주 인사를 했다.
그에 만적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리 좋지 않은 일 때문에 만났는데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겠소? 어서 빨리 담판을 냅시다.”
“그럽시다. 이 비무에서 지는 사람과 문파는 무순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이오.”
“물론이오.”
이미 하루 전에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미 하루 전에 만들어진 비무대에 올랐다.
그에 관전을 하러 온 사람들의 눈에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만적상은 마치 산적 같은 용모에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졌고, 철호심은 반대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학사 같은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서릿발 같은 기세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여서,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 곧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무대 주위를 돌며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클클! 이 늙은 거지가 오늘 호강을 하는구나.”
개방의 장로인 철견자(喆見者) 홍무규는 비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나무는 바로 청동흑룡상 근처에 자라고 있었는데, 수십 년을 무탈하게 자라 가지가 우거지고 나뭇잎이 무성해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라면, 비무대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어 일반인들은 도저히 비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대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홍무규가 개방의 장로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고강한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비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렇듯 편한 자세로 구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주위에 아무도 없이 고즈넉하게 비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대력보와 용선장의 주인들이 강호의 일절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홍무규는 비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미 두 사람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검기와 도기가 허공을 가르는 모습이 살을 떨리게 할 만큼 위맹스러웠다.
다른 이들에게는 살 떨리는 광경이었지만, 홍무규에게는 매우 좋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철견자 홍무규, 그는 개방의 장로였다.
하지만 천하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개방의 제자들이었다.
그것은 그의 방랑벽에 기인했다.
개방의 장로이면서도 방랑벽이 많아 천하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바로 홍무규의 기벽이었다.
때문에 개방 내에서도 그의 존재에 대해 아는 거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오늘도 그는 대력보와 용선장의 주인들이 비무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천 리 밖에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클클!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지.”
그의 눈에는 흥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 비무의 결과가 어찌 나올지 매우 궁금했다.
그에 따라 향후 몇십 년간 요녕성을 지배하는 문파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것이 바로 만 보주의 절기라는 무쌍패도(無雙覇刀)구나. 과연 이름처럼 패도적이기 이를 데 없는 절기로다. 오호! 철 장주의 절기도 그에 못지않구나. 저것이 바로 철 장주의 평생 절기인 용상검(龍象劍)이겠군. 흘흘! 오늘 이 거지가 개안을 하는구나.”
홍무규는 두 사람의 대결을 보면서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오늘의 비무 결과는 고스란히 개방의 정보록에 기재될 것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보관될 것이다.
그것은 정보가 생명인 개방의 특성 때문이었다.
비록 방랑벽 때문에 천하를 떠돌아다닌다 하더라도, 홍무규는 개방의 장로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홍무규는 두 사람의 대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두 사람의 대결에 점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는 계속해서 비무를 보려 했지만, 그의 신경은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듯 그에게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홍무규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수많은 비무를 봐 왔지만 한 번도 이랬던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저 노인…….”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청동흑룡상의 곁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비록 비무에 정신이 팔렸다고 하지만 그래도 강호의 고수라고 자부하는 홍무규가 언제 왔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노인이었다.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홍무규는 비무에 집중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비무는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홍무규는 도대체 노인의 무엇이 자신의 관심을 이토록 끄는 것인지 살피기 시작했다.
칙칙한 흑의를 입고 희끗한 머리를 흩날리는 노인,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홍무규는 노인에게서 함부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흑의 노인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의 왼손이 청동흑룡상을 짚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허어~! 내가 망령이라도 들었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홍무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허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독하디독한 화주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홍무규는 다시 흑의 노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엇이 그토록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야. 사람이라면 그 어떤 기세라도 느껴져야 하는 법인데, 저 노인에게는 전혀 그런 게 없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게야.”
대신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한 불안감이었다.
강호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소리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홍무규의 귀에 흑의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원, 이 정도였던가? 운이 좋군. 그러나…….”
무엇이 운이 좋다는 말일까?
그러나 홍무규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흑의 노인이 어루만지던 청동흑룡상에서 손을 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보…….”
홍무규가 급히 노인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순간 흑의 노인의 눈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무색투명한 흑의 노인의 두 눈이 섬뜩하게 가슴을 후벼 팠다.
홍무규도 강호의 절정 고수라고 자부하였지만 순간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홍무규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절정 고수인 그가 단지 노인의 눈빛 하나에 제압된 것이다.
흑의 노인은 천천히 혈루평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홍무규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휴우-!”
그가 완벽하게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홍무규는 겨우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이미 대력보주와 용선장주의 비무 따위는 홍무규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급히 이제까지 흑의 노인이 서 있던 자리로 내려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흑의 노인이 있던 자리를 살펴봤다.
그러나 흑의 노인에 대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일까? 누군데 단지 눈빛 하나로 나를…… 제압한단 말인가?”
부르르!
다시 한 번 그의 눈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홍무규는 흑의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고려가 있는 방향, 그렇다면 그는 고려인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고 보니 중원인들과는 약간은 다른 외모인 것 같기도 했다.
“와아아-!”
그 순간 비무대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승자가 가려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홍무규는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미 저들의 비무는 그의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그의 관심은 온통 흑의 노인에게 쏠려 있었다.
승자가 가려진 후 비무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금세 흩어졌다.
때문에 혈루평에는 홍무규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우두둑!
그때 홍무규의 귓가에 무언가 우그러드는 소리가 들렸다.
홍무규의 시선이 청동흑룡상을 향했다.
그 순간 홍무규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까 흑의 노인이 어루만졌던 청동흑룡상의 몸통에 갑자기 나타나는 한 치 깊이의 손바닥 자국.
그러나 홍무규가 경악한 것은 단지 손바닥 자국 때문이 아니었다.
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청동흑룡상이 우그러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청동흑룡상에 나타나 있는 손바닥 자국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손바닥 자국을 중심으로 청동흑룡상의 거대한 몸통이 우그러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분근착골(分筋錯骨)을 당하는 죄수의 모습과 비슷했다.
근육이 어긋나고 뼈가 제자리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청동흑룡상 역시 손바닥을 중심으로 제멋대로 뒤틀리고 있었다.
“도…… 도대체?”
홍무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그극!
그가 망연히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청동흑룡상은 제멋대로 우그러들고 일그러지며 변형을 일으켰다.
만 근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청동흑룡상이 둥그런 고철로 변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있어 두 손으로 청동흑룡상을 꼭꼭 뭉쳐 놓은 모습과 비슷했다.
“이런 무공이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단지 어루만졌을 뿐인데 길이 삼 장, 높이 이 장의 거대한 청동 구조물이 분근착골을 당한 죄수처럼 우그러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노인의 손바닥 자국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홍무규의 등을 타고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만일 이 무공이 사람에게 펼쳐진다면?”
단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람의 몸무게가 제아무리 많이 나가 봐야 이백여 근에 불과하다.
결코 만 근의 청동흑룡상과 비교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강도 면에서는 더더욱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런 무공 앞에서라면 금강불괴라 할지라도 한 줌의 고철에 불과할 것이다.
“도대체 그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누구이기에…….”
홍무규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그러진 청동흑룡상.
그것이 마치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비록 미약한 소리였지만 홍무규는 똑똑히 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내 후예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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